유재라봉사상 제8대 수상자 원순련
◈ 1971년 여름
1971년 여름. 지금 돌이켜보니 참 까마득한 옛 이야기이다. 아무리 오래 된 이야기라도 나는 지금까지 이 일을 잊지 못하고, 고마워하고 있다. 내가 태어난 곳은 거제도이다. 지금은 거제도를 모르는 사람이 없고, 지금 거제도는 육지와 연결되는 다리가 3개나 있어 새벽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 일을 처리하고 거제도로 내려와 다음날 출근이 가능한 섬이다.
1971년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그 시절 거제도는 너무나 힘든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지금이야 대우조선과 삼성조선의 일자리로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지만 그 당시 거제는 농사를 짓거나 고기를 잡아 근근히 삶을 영위하고 있을 때였다.
7남매의 둘째 딸인 나는 장학금을 받고 학교를 다녔지만 고등학교 3학년이 되니 장학금을 받을 수 없었다. 요즘처럼 아르바이트를 할 곳도 없고 학생이 돈을 벌 수 있는 시절이 아니어서 학비 때문에 학교를 중단해야 하는 난감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 때 여고생들이 즐겨 읽는 잡지가 있었는데 그 잡지에 유한양행과 국제타이즈에서 전국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장학생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나는 얼른 행정실에서 성적 증명서 1통을 유한양행으로 보냈다. 그랬더니 담당자가 이렇게 회신을 보내왔다.
“학생은 성적은 월등하나 보낸 서류가 미비하니 서류를 갖추어 보내면 장학 생으로 선발될 수 있으니 곧 서류를 완비하여 보내길 바란다.”
나는 얼른 행정실로 가서 구비서류를 준비하려니 수수료가 810원이나 되었다. 솔직히 나는 810원의 수수료를 낼 처지도 못 되어 행정실 직원에게 외상으로 서류를 해 주면 유한양행에서 장학금을 받아서 갚겠다고 했다.
행정실 직원은 별난 학생 다 보겠다는 눈빛이었지만 정말 외상으로 서류를 준비해 주어 나는 유한양행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 그리고 전국에서 선발된 장학생 20명 정도가 그해 여름 서울로 올라가서 2박3일의 연수를 마치고 장학금을 받아서 고등학교 3학년의 학비를 낼 수 있었고, 행정실에 810원의 수수료를 갚을 수 있었다.
거제도 섬에서만 살아온 내가 ‘유한양행’이라는 기업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이다. 이렇게 어려움 끝에 교사가 된 나는 늘 ‘유한양행’이라는 기업을 머리에 새겨두고 있었고, 약국에서 약을 살 때면 당연히 ‘유한양행’ 약품을 구입해 왔다.
◈ 1979년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유한양행의 도움으로 고등학교를 마친 나는 시골의 작은 회사에서 경리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국방송통신대학 초등교육학과에 입학을 하고, 주간엔 회사원으로, 야간엔 방송통신대학 학생으로 생활하며 드디어 1979년 초등학교 교사 임용고시를 치른 후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초등교사로 근무를 한지 20여년 쯤 지난 1998년 나는 거제도에서도 다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작은 섬마을의 분교에 부임을 했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모두 11명의 아이들이 모여 있는 분교엔 아이들보다 바다에서 기어 올라온 바다게가 더 많이 기어 다니는 그런 학교였다.
초등학생들은 물론 중학생, 고등학생, 마을 사람들까지 모아서 저녁마다 글쓰기를 지도했고, 해마다 카페리호에서 학예회를 하며 마을 사람들을 위한 일을 발 벗고 뛰어 다녔다. 이 일이 경상남도 교육청에 알려져 유한재단의 ‘유재라봉사상’을 수상하게 되는 영광을 안게 된 것이다.
유재라 봉사상 수상식 장을 찾아서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이 유일한 역사관을 찾은 것이다. 그분의 살아오신 흔적을 읽어가면서 모든 것 다 나라에 헌신하고 떠나신 유일한 역사관 앞에서 나도 몰래 고개가 숙여졌다. 그리고 수상 소감을 이야기할 때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된 것이 유한의 도움 때문이었는데, 28년 만에 다시 ‘유한재단’의 유재라 봉사상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격적이어서 내 목소리는 떨렸고 나도 몰래 눈물이 흘러내렸다.
◈시상금 5백만원 모두 장학금으로
그 때 내가 근무했던 섬마을의 산달분교엔 참 어려운 학생이 있었다.
어선을 타다가 사고로 팔이 없는 부모, 소아마비로 다리를 사용할 수 없는 부모를 둔 학생이 있었다. 이 아이들은 부모의 장애로 상급학교는 갈 수 없는 처지였다. 그 때 나는 유일한 역사관 앞에서 본 유일한 회장의 삶을 생각하면서 단호한 결심을 했다. 상금 5백만원을 두 아이에게 250만원씩 장학금으로 통장을 만들어 부모님께 드렸다. 그 땐 250만원이면 고등학교 3년을 보낼 수 있는 학비가 되고도 남는 금액이었다.
◈유재라봉사상 ‘수상자 모임’
교직생활을 오래하다 보니 교육자로서의 큰 상을 받은 적이 3번 있었다. 상금의 액수가 많은 곳도 있었다. 그러나 해마다 역대 수상자들을 시상식장으로 불러서 함께 축하를 하고, 오고 가는 교통비를 지불하는 곳은 정말 유한재단 뿐이었다.
이렇게 모이다 보니 역대 수상자들도 유한재단의 고마움을 진심으로 느끼게 되고, ‘유재라봉사상’수상자에 걸맞는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하여 만든 단체가 ‘유재라봉사상 수상자 모임’이며 이 모임에서 성금을 모아 수상자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돕는 단체로 거듭난 것이다.
고마운 것은 수상자 모임의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이만희 이사장님께서 5백 만원의 종자돈을 허락하셨고, 참가한 수상자들이 3만원씩 모아 우리 주변의 힘들고 어려운 사람을 찾아 두 사람을 정해 5십만원씩 지원하고 있다. (처음엔 한 사람에게 오십만원 지급)
더 고마운 것은 수상자모임의 생각에 유한재단에서도 2019년, 2022년 두 번에 걸쳐 두 사람에게 5십만원씩 어려운 사람을 지원하고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사랑은 돌고 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때 장학금을 주어 고등학교를 졸업시켜 준 유한양행의 도움으로 지금 나는 교장이 되었고, 교육학 박사가 되었고, 지금도 겸임교수로 재직중이다.
자랑같지만 내가 졸업시킨 고등학생이 25명을 넘었고. 내가 대학입학금을 준 학생이 5명이 넘었다. 그리고 대학교에서 받은 급료는 내가 재직하고 있는 대학에 장학금으로 돌려주고 있다.
지금도 나는 ‘유한’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1971년 학비를 내지 못하는 내게 장학금을 주어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해 주었고, 유재라봉사상까지 수상하게 되었고,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된 나의 모든 것은 ‘유한’이라는 이름이 있었기 때문임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